안녕하세욘..갑자기 블로그에 관심이 생겨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분위기가 좋아서 들려봅니당..이번에
스킨제작한 블로그임당..관심있으시면 한번 들려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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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자료 여러가지 정보 업뎃예정임당..^^
방명록에 원하시는 자료있으면 써주시면 바로 올려드리도록 할게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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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하님, 다녀갑니다. 가끔씩 올께요... 좋은 글 많은 것 같아, 무엇보다 자신의 솔직한 느낌이 담긴글이 좋은 것 같아... 그럼 담에 보자구,,,
반가워요 ^^ 카페와 블로그의 연동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우리 다음 카페회원들 ㅋㅋ
순명(順命)
롬6:15-18
(2006/11/12)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 하나님께 바치는 최고의 경배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앉아 말씀을 주실 것을 청하고 성경을 펴자 오늘의 본문이 나왔습니다. 읽고 또 읽고는 메모지에 한자로 ‘順命’이라고 썼습니다. 이 단어는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제 삶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우리의 일생이란 우리가 선택한 오늘 하루를 닮는다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오늘을 사는 모습을 보면 그의 한 평생이 그려진다는 말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분주함 가운데서도 중심을 놓치지 말고, 어떤 일이든 기꺼이 감당하자고 스스로 다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順’이란 단어는 시내의 흐름을 뜻하는 ‘川’ 자와 머리를 뜻하는 ‘頁’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즉 우리 머리를 마땅히 그러해야 할 자리에 두고 사는 것이 ‘順’하는 삶입니다. 물의 흐름에는 억지가 없습니다. 낮은 곳이 있으면 거기로 흘러가고,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 흐르고, 폭포를 만나면 떨어지고, 웅덩이를 만나면 머뭅니다. 억지가 없기에 비애도 없습니다.
삶이 이렇게 자연스럽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마음은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변합니다. 喜怒哀樂愛惡欲의 七情 속에서 방황합니다. 이 지긋지긋한 방황을 끝내는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은 ‘命’에 ‘順’하는 것입니다. ‘命’은 높은 사람이나 신이 내리는 명령을 뜻하는 ‘令’ 자와 입을 뜻하는 ‘口’ 자가 결합된 글자입니다. 삶은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주어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삶이란 하나님의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헌신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인생이 너무 무거워지나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스승은 싱글벙글하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기가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누가 묻자 그는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기막히게 행복한 사람.” 좋지요? 이게 우리를 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사람의 소명이 행복 혹은 기쁨이라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을 짓습니다. 너무 평범해서 그런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며 기뻐하셨습니다. 수메르 신화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은 종으로 부리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창조가 하나님의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 감동하고 찬탄하고 행복을 누리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경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순명은 주의깊게 들음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이 질문은 참 불편합니다. 누군가가 서슴없이 ‘네’라고 대답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빛이 살짝 흔들립니다. 그들은 속으로 ‘팔자가 좋아서…’라는 말을 꿀꺽 삼킵니다. ‘아니오’라고 답하면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탐색하는 시선을 보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분주해서 행복을 맛보고 누릴 여유를 잃어버린 채 사는 것 같습니다. 남자용 속옷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로마에 다녀왔다고 말하자 동료가 물었습니다. “교황도 뵈었나?” “그럼.” “정말? 그래, 어떻던가?” “글쎄, 보아하니 사이즈가 100쯤 되더군.” 이게 우리 삶이 아닌가요? 정말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은 듣지 못하기에 삶이 어렵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행복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찬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된 것은 죄에 팔린 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세상의 만물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힘입니다. 죄는 무거움이어서 우리 영혼은 날개 잘린 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게 만듭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를 통하여 사람을 지배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롬5:21)이라 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지난 날 지은 모든 죄와 죄책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육체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지난날의 죄의 습성을 온전히 끊어버리지 못했습니다. 먹을 것에 욕심내고, 쾌락에 빠지고, 소유에 집착합니다. 화를 다스리지도 못합니다. 교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낙심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늘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순명의 자세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게 바로 성도의 삶의 태도입니다. 순종 혹은 순명을 뜻하는 영어 단어 ‘obedience’는 잘 듣는다는 뜻의 라틴어 ‘ob-audire’에서 나온 말입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주의깊게 듣는 태도를 가지고 살 때 우리는 죄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은 대중매체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화려한 이미지와 광고에 넋을 잃고 사는 한 우리 삶에 만족과 기쁨은 없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영혼은 새로운 것과 짜릿한 것을 찾아 다니느라 분주합니다. 불꽃을 향해 날아가는 부나비와 같습니다. 부나비는 그 황홀해 보이는 불꽃이 결국은 자기 날개를 태울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순명은 매일매일의 수행
지금 누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십니까? 우리 영혼이 들떠 있는 한 우리 귀에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안으로 거두어들임이 없이는 영혼이 성숙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오감은 성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바깥을 살피느라 늘 피곤합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느라(視聽嗅味觸) 쉴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 중 삼십 분만이라도 말과 생각을 그치고 오감을 쉬게 해보십시오. 몸과 마음의 평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감을 쉬게 하는 방법 중 제일 좋은 것은 조용히 눈을 감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그칠 때 하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순명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율성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삶의 주파수를 하늘에 맞추어놓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귀를 열어 놓고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예수님이 불행한 삶을 살았나요?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명은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강하게 하고 힘을 주는 양식이었습니다(요4:34).
가톨릭의 수도자들은 순명서원, 청빈서원, 정결서원 등 세 가지의 서원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런 서원이 인간성을 거슬리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복종을 포함하는 순명서원은 철저한 자율성과 개인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인간의 의식과 상충되고, 청빈서원은 우리 문화 안에서 가난해진다는 것은 실패와 무익함의 표지이기에 적절치 않고, 정결서원은 성적인 실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 권리의 불합리한 거부라는 것입니다. 그럴싸하긴 하지만 그들은 서원의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합니다. 서원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철저히 신뢰하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순명이란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건네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을 분별하여 따르는 것이 순명입니다. 하지만 순명은 하나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의 상호간의 윤리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교회 안에서 ‘내 지위가 높으니까 그대는 무조건 내 말을 따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억지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까닭은 나만의 소리를 내지 않고 다른 이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조화로운 화음을 이루는 것을 배우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순명이란 그러니까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더불어 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순명은 매일매일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미움과 냉담함을 극복해가는 수행이기도 한 것입니다.
순명의 반댓말은 불평입니다. 불평이란 존경심과 감사를 잃어버린 마음에 찾아든 병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들이 날마다 벌어집니다. 불의한 이들이 의로운 이들을 핍박합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우리 영혼은 불퉁거리는 병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물론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속절없이 흔들리는 우리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는 사탄에게 틈을 주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억울하다’는 생각을 주입하여, 우리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듭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한 죄의 종이 된다는 말이 아마 이런 뜻일 겁니다.
• 순명 속에 숨겨두신 귀한 보화
얼마 전 신문에서 원불교 대사식(戴謝式)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대사식이란 원불교의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종법사를 모시는 의식입니다. 기자는 원불교의 평화로운 대사식을 종교인들의 진퇴의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습니다. 원불교의 평화로운 대사식의 전통은 1994년에 대산 김대거 종법사가 종단 안팎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종법사직에서 물러나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면서 정착되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대산의 퇴임으로 새로운 종법사를 뽑기 위한 선거가 벌어졌습니다. 쉰 여덟 살의 좌산 이광정 종사와 여든 여덟 살로 교단의 최고 어른이었던 상산 박장식 종사가 후보로 나왔습니다. 선거 결과 젊은 좌산이 종법사로 선출되었습니다. 선거 결과가 나오자 상산은 즉시 좌산 종법사에게 五體投地로 절을 올렸습니다. 그 모습은 많은 신자들의 눈물을 자아냈습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상산은 순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셈입니다.
저는 수도원 운동의 기초를 닦은 베네딕토 성인이 쓴 <<수도 규칙>>을 읽다가 아주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수도 규칙>>의 22장은 <수도승들은 어떻게 잠자야 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베네딕토는 수도승들은 각각의 침대에서 자야 하며, 할 수 있다면 모든 이들이 같은 곳에서 자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무 많아서 부득이 나누어서 자야 하면 열 명씩 혹은 스무 명씩 자되 그들을 보살필 장로들이 함께 자야 합니다. 등불은 아침까지 침실에 밝혀둘 것이며, 옷은 입은 채로 자야 합니다. 띠나 끈도 맨 채로 자야 합니다. 그 까닭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수도사들은 항상 준비된 상태로 있다가, 신호가 나면 지체 없이 일어나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순명을 위한 준비인 셈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눅12:35). 바로 이것이 순명의 자세입니다.
저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 순명의 마음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날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죄의 달콤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쓰게 느껴지더라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형제 자매를 진심으로 존중하십시오. 그러면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평없이 서로 사랑하는 그 자리에 인생의 가장 귀한 보화를 숨겨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됩니다. 이보다 큰 보화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 보화를 찾아내 마음껏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나아갈 때와 머물 때
민9:15-23
(2006/11/19)
[성막을 세우던 날, 구름이 성막, 곧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을 덮었다. 저녁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불처럼 보였으며, 아침까지 그렇게 계속되었다. 그것은 늘 그러하였다.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으며, 밤에는 그 구름이 불처럼 보였다. 구름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갈 때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 길을 떠났고, 구름이 내려와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렇게 주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났고, 또한 주의 지시에 따라 진을 쳤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날 동안에는, 진에 머물렀다. 그 구름이 성막 위에 여러 날 동안 오래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주의 명을 지켜 길을 떠나지 않았다. 구름이 성막 위에 며칠만 머무를 때도 있었다. 그 때에는 그 때대로 주의 지시에 따라서 진을 치고, 또 주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나곤 하였다.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물러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아침이 되어 구름이 걷혀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 낮이든지 밤이든지 구름만 걷혀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 때로는 이틀이나 한 달이나 또는 몇 달씩 계속하여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으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 곳에 진을 친 채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름이 걷혀 올라가야만 길을 떠났다. 이렇게 그들은 주의 지시에 따라 진을 쳤고, 주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났다. 그들은, 주께서 모세를 시켜 분부하신 대로, 주의 명령을 지켰다.]
• 知機
그리스도의 평강이 오늘 예배에 참여한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 마음은 고요합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감사가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참 슬픈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떨어진 낙엽이 스산한 초겨울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마치 우리 마음인 듯 싶어 쓸쓸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구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광풍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몰리는 곳으로 달려가기에 분주합니다. 신도시 후보지로 달려가고, 뉴 타운으로 달려가고, 재개발 단지로 달려갑니다. 기독교인들조차 덩달아 내달리고 있습니다. 그게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바야흐로 돈은 누가 뭐래도 가장 각광받는 유사 신(quasi-god)이 되었습니다. 교회조차도 돈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교계 지도자들은 요즘 개신교인들이 줄고 있다고, 큰일이라고, 개탄을 하면서도 근본적인 신앙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들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16:3)
제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날이 흐리면 우산을 들고 나가고 찬 바람이 불면 목도리를 챙길 줄은 알지만, 이 시대가 짜장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풍습에 순응할 뿐입니다. 애굽의 포로 생활에서 가장 고약한 것이 뭔지 아십니까? 압제자가 제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그 일에 적응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수련의들이 교수들에게 욕을 먹고 얻어터지면서 수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자괴감을 느끼는 것은 그런 폭력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관행에 대해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문제임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노예화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참을성 있게 노예생활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시고, 저들을 그냥 두면 죽을 때까지 종살이를 계속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들을 광야로 인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영혼은 어떤 형편입니까? 기독교인은 하늘의 機微를 알아차리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과제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붙박혀 있는 우리의 눈길을 거두어 더 깊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 하나님은 우리 곁에 현존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 눈이 가리워있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굳어진 우리 마음이 한번 갈아엎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도리가 없습니다.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 하나님의 현존으로서의 말씀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성막을 세운 날, 구름이 성막을 뒤덮었습니다. 저녁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불처럼 보였습니다. 성경에서 구름과 불은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시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민수기의 기자는 구름이 성막에 덮였다고 말하면서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이라고 재차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중 구조로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미 성막 한복판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음을 알고 있고, 지성소의 한 복판에는 십계명 돌판이 든 증거궤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자칫하면 우리의 관심이 구름과 불에 집중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가시적 상징일 뿐입니다. 아니, 어쩌면 구름과 불은 하나님을 드러내면서도 숨기는 것이라 해야 옳을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구름과 불을 넘어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대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한 왕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너무도 그리웠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는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만큼 아버지가 더욱더 그리워졌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아 한탄을 했습니다. “아아, 아버지의 손을 만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신다면 그 손을 꼭 껴안으련만. 내 아버지요 스승이며 빛이신 그분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입술에 담아 그 손가락마다에 입을 맞추리라!” 그가 이렇게 아버지를 만져 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한탄하는 동안, 머리에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편지가, 당신 손으로 직접 쓰신 편지가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친필이라면 그분의 손과 맞먹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의 가슴에서 큰 기쁨이 솟구쳤습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사람을 찾는 하느님>, 95쪽)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의 징표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거룩의 현존인 성막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와 진리’야말로 구약에서 말하는 구름과 불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인격속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삶이 곧 길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 sweet surrender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떠날 때와 머물 때를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성막을 뒤덮고 있는 구름과 불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갈 때면 길을 떠났고, 구름이 내려와 머물면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쳤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하루만 머물 때도 있었고 며칠 동안 머물 때도 있었고 몇 달 동안 머물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앞지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여건이 좋아 더 머물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바로 떠나고 싶은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고 그 뜻에 순종했습니다. 내 경험, 내 판단, 내 편의대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곳에는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의 시인과 지혜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잠3:5-6)
믿음이란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 가운데서 꾸준히 기다리면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믿음이란 또한 ‘내려놓음’입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세상에 살면서 우리 영혼은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의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쉬십시오. 그러면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마음에 흘러들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좀 바쁘게 지내는 것 같다면서 염려를 하십니다. 저도 한 동안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도 결코 짓눌리지는 않습니다. 꾸준히 하나님께 내 삶을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요구받을 때 저는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먼저 가늠해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시는지를 여쭈어보고, 그렇다는 확신이 들 때에 그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런 확신이 들지 않으면 거절합니다. 그래서 결정한 일을 수행할 때는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내가 만나는 이들 속에 긍정적인 생각과 힘을 심어주기를 청하고 나아가면 어떤 일도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 자신을 내적으로 강화해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주께서 가라시면 가고, 머물라 하시면 머물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사는 순간 우리 삶의 무게는 가벼워집니다.
• 교회: 생명의 생태계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목해 보아야 할 대목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압제와 예속의 애굽을 떠나 자유와 평등의 새 땅을 향해 나아가자면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든든한 영적인 지원군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희망 발전소이고, 상처입은 영혼의 쉼터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한 제일 큰 책임은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목회자들로 하여금 예수정신의 핵심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교회들은 시대 정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세속의 물결을 추종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현실의 문화를 추종하는 순간 그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중세의 신비주의 사상가인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khart)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보다는 우리가 무엇하는 사람인가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하늘을 가리켜 보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해서 초월과 갱신과 희망의 원리를 민족과 세계 앞에 제시해야 합니다. 교회가 우리끼리만 흐뭇한 ‘당신들의 천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지배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돈의 지배를 벗어난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크기의 신화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것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나눔이 부족해서입니다. 우리 마음에 금송아지가 세워질 때마다 하나님이 손수 쓰신 돌판은 깨지게 마련입니다. 돈에게 삶의 주도권을 맡기는 순간 하나님의 뜻은 가뭇없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하다 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끈질기게 기다리면서 나누고, 섬기고, 돌볼 때 우리 삶은 놀랍게도 풍성해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예배와 학습과 실천을 통해 이런 삶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가슴 벅찬 소명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