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1. 17:14 카테고리 없음

신문왕의 업적에 대해 알아보자. 


진골출신 신문왕과 장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장인 김흠돌의 모반 사건이 있었다.(김흠돌의 난) 김흠돌 역시 김군관처럼 삼국통일 전쟁에 상당한 군공을 세웠으며, 자신의 딸을 당시 태자였던 신문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로 상당한 위세를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김흠돌을 견제하고 전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고, 김흠돌이 모반 사건을 일으키자 그것으로 말미암아 상대등을 비롯한 상당한 수의 귀족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원래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도 아비의 모반죄에 엮어 궁에서 쫓아내 버리고, 일길찬 김흠운과 요석공주의 딸 신목왕후를 새 왕비로 들였다.토사구팽. 신문왕의 후계자인 효소왕과 성덕왕은 모두 그녀의 소생이다. 신목왕후를 왕비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개원, 삼광, 문영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개원은 태종 무열왕의 아들, 삼광은 김유신의 아들, 문영은 황산벌 전투의 선봉장이었던 김유신의 심복 출신이다. 김흠운은 태종 무열왕의 사위이자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수이고, 납비의 절차에 참가한 이들이 하나같이 왕권과 밀착된 인물이었던 만큼 새 왕비를 맞이하는 절차 자체가 전제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흠돌의 모반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김군관과 김흠돌이 긴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김군관이 강등되자 위기 의식을 느꼈으며 딸이 신문왕의 비였지만 소생이 없었던 것도 그의 위기 의식을 부채질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김흠돌은 어차피 왕의 장인이었던만큼 굳이 모반을 꾀할 정도로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으며 오히려 이 사건은 신문왕이나 그 수하가 조작한 친위 쿠데타였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로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다는 해석이 통설이다.

posted by 브룽브룽